Jazz Story

청와대근처 희한한 라이브카페

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라이브카페. 5백m밖에 안떨어진 코닿을 거리다. 긴머리. 가녀린 몸매. 우수에 가득차 보이는 큰 눈동자. 이목구비가 뚜렷한 중년의 미인 임애균사장(42)이 운영하는 재즈스토리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지만 기절할 정도로 분위기가 색다르다.

도심은 커녕 허름하고 한적한 변두리 같다. 간판조차 걸려 있지 않다. 금방이라도 무너저 내릴까 겁이 난다. 재개발을 하려고 불도저로 반쯤 밀어낸 집 같다. 뭐이런곳이 다있나 싶지만 겉보기와는 전혀 딴판이다. 실내에 들어서니 공연중이다. 저녁 9시40분. 언더보컬그룹이 라이브공연을 한다. 팝을 열창한다. 드럼소리가 경쾌하다. 듣기만 하여도 기분이 난다.

벽에는 외국지폐가 만국기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다. 외국에 다녀온 손님들이 기증한 것이란다.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임사장이 이런 분위기의 카페를 차린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에서 20년 가까이 살다가 고국에 와보니 너무 달라 보였다.

어느 건물을 들어가 보아도 겉모습이 더 화려했다. 화려한 간판. 조명. 색깔. 등등. 저렇게 화려해 보이는 건물속에는 얼마나 잘 꾸며놓았을까? 그러나 막상 내부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겉은 초라하더라도 속은 알차고 실속있게 꾸미고 싶었다. 기왕이면 분위기 있는 카페로… 94년 9월 종로구 삼청동 바로 이곳 카페를 오픈했다.

임사장은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일본에는 고1때 건너갔다. 당시 외삼촌이 일본에 살고 있었다. 일본에 와서 공부하라는 외삼촌의 권유를 받고 현해탄을 넘었다. 그러나 막상 일본에 가서는 외삼촌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외삼촌은 도쿄에서 살았고 그녀는 나고야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일본어는 어려서부터 익혔기 때문에 언어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고등학교때 여성전용 독신자 아파트에서 지냈다. 대학은 안무를 전공했다.

대학졸업후 외삼촌이 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종합건설회사를 운영하였다. 100명 넘는 직원을 거느린 여사장이 되었다. 건설업에 잔뼈가 굵은 외삼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본에 살면서 잘생기고 멋있는 한국인 남자를 만나 결혼도 했다. 둘이는 결혼을 하고도 자주 만날수가 없었다. 남편이 한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만나는 연말부부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잘나가는 여자였다. 그러던 그녀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 갑자기 일본이 싫어졌다.

한국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못간 것이 두고 두고 후회가 되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충격이 컸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당연히 어머니는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로 이세상에 없구나 생각하니 견딜수가 없었다. 갑자기 일본이 낯설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3년후 일본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서울로 왔다.

한국에서 카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988년 올림픽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고등학교 시절 즐겨듣던 음악을 감상할만한 곳이 없었다. 어디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그시절 그음악을 들을만한 장소를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학창시절 좋아했던 음악도 다시 듣고 기계음이 아닌 뮤지션들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라이브공연도 할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바로 라이브카페.

한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목이 좋은 지금의 자리를 찾아냈다. 기존의 카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꾸미고 싶었다. 사라져 가는 우리문화를 살리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분위기를 살펴보자. 화장실. 양변기를 모두 없애버리는 대신 쟁기 삽등 농기구로 꾸며서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우리것은 역시 소중하고 좋은 것이라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카페외부의 한없이 초라하고 허름해 보이는 모습역시 치밀하게 계산된 이사장의 머리속에서 나온 인테리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번이라도 이곳 카페를 찾아본 사람이라면 그때 그분위기를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온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비행기와 자전거.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권장 액자도 눈길을 끈다. 대장간에서 쓰던 집게. 철근으로 얼기설기 만든 선반. 벽에는 손님들이 남긴 낙서반 시가 반이다. 메뉴판도 아예 두툼한 낙서책으로 만들었다. 손님들이 마음놓고 메뉴판에 낙서를 한다. 악기와 술병들이 실내장식 소품으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카페 간판도 일부러 달지 않았다. 10년쯤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카페가 잘된다면 그때가서 간판을 달 생각이다. 간판이 없지만 사람들은 잘도 찾아온다. 카페 이름도 손님들이 만들어서 편한대로 부른다. 귀곡카페. 헐리는 집. 허물어지는 집. 철거하는 집. 철거하기 전 집. 철거민의 집. 무너저 내리는 집. 손님마다 자기 취향에 맞는 이름을 만들어낸다. 임사장은 오히려 그것이 더 마음에 든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온다. 독특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란다. 공항에 내리자 마자 그때 그집이 그대로 있나 확인해보고 싶어 단숨에 달려온다는 열성파 손님도 있다. 그럴때마다 임사장은 보람을 느낀다.

카페를 열던 초창기에는 개그맨 전유성씨가 많이 선전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큰 돈은 되지 않는다. 라이브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에게 나가는 비용등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노력하는 만큼의 금전적인 대가는 별로 없는 편이지만 이곳을 사랑해주는 손님들이 있기에 보람을 느낀다.

한번은 부부가 찾아왔다. 이곳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했단다. 그러나 심한 부부싸움으로 두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갈라서기 직전에 이곳에 함께 왔다가 화해를 하고 위기를 넘겼다. 카페에 와서 달콤했던 옛날분위기로 다시 돌아가 임신까지 하고 지금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잃어버린 행복을 찾게 해줘 고맙다며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임사장은 보람을 느낀다.

임사장은 음악을 유난히 좋아한다. 특히 밥딜런 노래는 듣고 또 들어도 기분이 좋다. 아무리 화가 나다가도 밥딜런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카페의 한쪽벽이 음반으로 가득 차있다. 비치해 놓은 것만도 5천장이 넘는다. 소장한 음반을 모두 합치면 1만 5천장이나 된다. 50년전음반도 있다.

처음에는 재즈라이브도 함께 했다. 그러나 IMF이후로는 팝만 한다. 6명의 보컬그룹이 매일 3차례씩 라이브공연을 한다. 임사장은 그들과 계약을 맺지 않는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떠나고 싶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놔둔다. 그러나 임사장이 먼저 내보내는 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컬그룹멤버들은 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사장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5년넘게 장기근무하는 멤버도 있다.

임사장은 보컬그룹멤버들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대모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거친 뮤지션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오디션을 받지 않을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는다.

임사장의 카페에는 '노네임 보컬그룹' 외에도 많은 언더가수들이 라이브공연을 한다. 초저녁에는 통기타가수가 나와 올드팝을 부른다. 노네임 보컬그룹 공연이 끝나면 또다른 여자솔로가 나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한다. 일요일에는 '사랑과 평화' 공연을 한다.

임사장은 지금도 주말부부다. 남편이 제주도에 라이브카페를 냈기 때문이다. 제주도 카페는 이곳보다 더 분위기있게 꾸며 놓았다고 자랑한다. 제주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깡통카페로 가자면 두말않고 찾아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옛날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만나던 연말부부였는데 지금은 제주와 서울에 떨어져 살아서 주말부부가 되었다며 웃는다.

임사장 부부는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라이브 카페와 청와대에서 가장 먼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는 셈이다.

연락처
경향월드넷(인터넷신문)에서 발췌